소심한 A형과 또라이 AB형의 진실: 우생학이 낳은 아시아 최대의 사이비 종교, '혈액형 성격설'

"너 또라이 같은 거 보니까 딱 AB형이지?" "야 쟤는 완전 소심한 A형이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고, 은근히 믿고 있는 혈액형 성격설. 소개팅 자리에서 별자리보다 더 흔하게 물어보는 이 놀라운 심리 분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요? 피 4종류로 전 국민을 완벽하게 쪼개버린 기괴한 유사 과학의 탄생 비화를 탈탈 털어봅니다.

Antigravity AI · 2023년 1월 20일 · 읽는 데 3분

서론: 미국인들은 자기 혈액형을 모른다

만약 여러분이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파란 눈의 외국인에게 "What's your blood type? (너 혈액형이 뭐야?)"라고 묻는다면 십중팔구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입니다. "혈액형? 갑자기 웬 피? 나 지금 수술해야 해? 몰라, 병원 기록 떼어봐야 알 수 있어."

유럽이나 미주 지역 사람들은 큰 수술을 받거나 헌혈할 때가 아니면 평생 자기 혈액형이 뭔지도 모르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을 4개로 분류하고 궁합을 따지며 호들갑을 떠는 나라는 전 세계 200개가 넘는 국가 중 오직 '대한민국'과 '일본', 딱 두 나라뿐입니다. 도대체 이 기괴하고 맹목적인 믿음은 언제, 어디서 시작된 걸까요?

본론: 제국주의와 우생학이 낳은 끔찍한 족보

1. 피로 우열을 나누고 싶었던 독일인들

1900년 초, 오스트리아의 의사 란트슈타이너가 사람의 피를 섞으면 굳어버리는 현상을 연구하다가 인류 최초로 혈액형(A, B, O, AB)이라는 개념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수혈 부작용을 막기 위한 순수한 의학적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1910년대, 미쳐 돌아가던 독일 제국주의 학자들이 이 혈액형을 '우생학(인종 차별)'에 악용하기 시작합니다.

  • "위대한 서양(백인) 사람들은 A형과 O형이 압도적으로 많다."
  • "반면, 저기 미개한 동양인(아시아)과 흑인 놈들은 B형이 엄청나게 많다!" 즉, A형과 O형은 우수하고 지능이 높으며, B형은 진화가 덜 된 짐승 같은 열등한 인종이라는 미친 논리를 만들어 퍼뜨린 것입니다.

2. 일본의 식민 통치에 악용된 B형의 저주

이 백인들의 헛소리를 찰떡같이 주워 먹은 나라가 바로 1920년대의 '일본 제국'이었습니다. 당시 식민 지배를 하던 일본 학자들이 대만의 원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그들의 피를 뽑아 검사해 봅니다.

  • "대만 원주민 놈들 피를 뽑아보니 41%가 O형이네. O형은 반항심이 강해."
  • "근데 온순하게 말 잘 듣는 일본의 아이누족은 피를 뽑아보니 B형이네? B형은 굽신거리는 놈들이야!" 라며 자기들 입맛대로 피를 뽑아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코미디 같은 논문을 찍어냅니다.

3. 방송작가가 만들어낸 대국민 사기극

2차 세계대전 이후 사라진 줄 알았던 이 미신을 부활시킨 장본인은 의사도 과학자도 아니었습니다. 1971년, '노미 마사히코'라는 일본의 일개 방송 작가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아무런 통계학적, 의학적 근거도 없이 소설책 쓰듯 <혈액형으로 알 수 있는 상성>이라는 책을 출판합니다.

  • A형 = 성실하지만 소심함
  • B형 = 자기중심적이고 제멋대로임
  • O형 = 리더십이 강함
  • AB형 = 천재 아니면 바보 이 재미로 쓴 불쏘시개 책이 일본에서 초대박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0년대 PC통신과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한국으로 고스란히 수입되면서 대한민국 전 국민의 뇌리에 '혈액형 성격설'이라는 바이블로 꽂혀버리게 된 것입니다.

결론: 바넘 효과,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과학적으로 A, B, O형을 나누는 기준은 적혈구 껍질 표면에 붙어있는 '단백질(당사슬)의 모양이 뾰족하냐 동그랗냐' 딱 그 차이 하나뿐입니다. 이 적혈구 껍데기의 모양이 뇌의 뉴런이나 호르몬(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는 단 1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혈액형 성격이 딱 들어맞는다고 소름 돋아 할까요? 심리학에서는 이를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 부릅니다. "당신은 평소엔 온화하지만, 한 번 빡치면 무서운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밝아 보여도 속으로는 외로움을 탑니다." 이런 말은 A형, B형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양면성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4가지 틀을 미리 만들어놓고, 상대방이 소심한 행동을 한 번만 해도 "거봐! 너 A형이라 그래!"라며 자신의 믿음에 억지로 꿰어맞춰 버리는 것(확증 편향)입니다.

혈액형으로 성격을 나누는 것은, 머리카락이 직모냐 곱슬머리냐에 따라 꼼꼼한 사람과 덜렁대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과 똑같이 미개한 짓입니다. 술자리의 가벼운 농담은 좋지만, 적혈구 껍데기 모양으로 타인의 무한한 우주(성격)를 4개의 칸막이에 가둬버리는 촌극은 이제 멈춰야 할 때입니다.

이어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