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피 속의 적군과 아군: A, B, O, AB 혈액형은 어떻게 결정될까?

왜 다른 혈액형의 피를 수혈받으면 피가 굳어서 죽게 될까요? 1900년 카를 란트슈타이너가 발견한 ABO식 혈액형의 생물학적 원리와, 적혈구 표면에 붙어있는 항원과 항체의 치열한 방어 메커니즘을 알아봅니다.

Antigravity AI · 2023년 12월 21일 · 읽는 데 3분

서론: 피를 섞으면 왜 죽을까?

19세기 전까지 병원에서 피를 많이 흘린 환자에게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하는 것은 목숨을 건 '러시안룰렛'이었습니다. 어떤 환자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어떤 환자는 수혈을 받자마자 피가 핏덩어리(혈전)로 굳어버리며 끔찍한 고통 속에 즉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의사들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이 끔찍한 수혈 사고의 저주를 끝낸 영웅은 오스트리아의 의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였습니다. 그는 1900년, 사람들의 피를 섞어보는 실험을 하다가 "피와 피가 섞일 때 특정한 규칙을 가지고 덩어리로 굳어버린다(응집 반응)"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구원한 ABO식 혈액형의 위대한 발견입니다.

본론: 적혈구 껍데기의 명찰(항원)과 방어군(항체)

혈액형이 결정되는 원리는 군대의 '피아식별(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것)' 시스템과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1. 명찰(항원)의 종류

우리의 피 속에는 산소를 나르는 붉은 세포인 '적혈구'가 둥둥 떠다닙니다. 이 적혈구의 겉표면(껍데기)에는 내가 누구인지 알리는 **'당단백질 명찰(항원)'**이 붙어있습니다. 이 명찰의 모양은 유전자에 의해 두 가지로 나뉩니다.

  • A형 명찰: A 모양의 항원을 가집니다.
  • B형 명찰: B 모양의 항원을 가집니다.

2. 방어군(항체)의 공격

내 피 속의 혈청(물)에는 나와 다른 모양의 명찰을 단 외부 침입자(적군)가 들어오면 즉시 달려가 엉겨 붙어 죽여버리는 특수 방어군(항체)이 항상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 A형 혈액형: 적혈구에 'A 명찰'을 달고 있습니다. 내 피 속에는 B 명찰을 죽이는 **'B 방어군(항B 항체)'**이 순찰을 돕니다. 만약 B형 피가 수혈되어 들어오면, B 방어군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 피를 응고시켜(굳혀) 죽여버립니다.
  • B형 혈액형: 'B 명찰'을 달고 있으며, 피 속에 A 명찰을 죽이는 **'A 방어군(항A 항체)'**을 가지고 있습니다. A형 피가 들어오면 공격합니다.
  • AB형 혈액형: 가장 이기적(?)인 피입니다. 적혈구 표면에 **'A 명찰과 B 명찰'**을 둘 다 달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 피 속에 A 방어군이나 B 방어군이 있으면 나 자신을 공격해 버리므로, 방어군(항체)이 아예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방어군이 없으니 A형, B형, O형 어떤 피를 수혈받아도 공격하지 않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범용 수혈자'입니다.
  • O형 혈액형: 숫자 0(Zero)을 의미합니다. 적혈구 껍데기에 명찰(항원)이 아예 없습니다. 아무 명찰도 없으니 다른 사람 몸에 쓱 들어가도 적군으로 인식되지 않아 누구에게나 피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범용 공혈자'입니다. 하지만 명찰이 없는 대신 피 속에 'A 방어군과 B 방어군'을 둘 다 빡세게 굴리고 있기 때문에, 오직 같은 O형의 피만 수혈받을 수 있습니다.

3. Rh 혈액형 시스템 (플러스와 마이너스)

우리는 혈액형 뒤에 +나 -를 붙입니다. 란트슈타이너는 훗날 붉은털원숭이(Rhesus monkey)의 피를 연구하다가 적혈구에 A, B 명찰 외에 또 다른 'D 명찰(Rh 인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D 명찰을 달고 있으면 Rh+, 없으면 Rh-입니다. 아시아인은 99.5%가 Rh+이지만, 서양인은 15% 정도가 Rh-입니다. Rh-인 사람은 피 속에 강력한 'D 방어군'을 만들 수 있으므로 절대 Rh+의 피를 섞어 받으면 안 됩니다.

결론: 진화의 다양성이 만든 방어막

란트슈타이너는 이 ABO 혈액형을 발견한 공로로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고, 외과 수술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은 왜 사람들의 혈액형을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다르게 섞어 놓았을까요? 진화생물학자들은 이것이 '전염병(바이러스)'으로부터 인류 전체가 몰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생물학적 다양성의 방패'**라고 설명합니다. 특정 바이러스(콜레라, 말라리아 등)는 특정 혈액형의 명찰(항원)에 더 잘 들러붙습니다. 모든 인간이 혈액형이 같았다면 강력한 전염병 한 번에 인류는 멸종했겠지만, 피의 종류가 달랐기에 누군가는 살아남아 인류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읽기